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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겨울 준비의 소리, 뽀드득 솜틀방의 하루
“다다다다— 푸스스…”
겨울이 오기 전, 동네 어귀에선 낯익은 기계 소리와 함께 하얀 솜이 구름처럼 흩날렸다. 그곳은 솜틀방, 그리고 그 안을 지키던 이들은 솜틀이 장인들이었다. 한때 이들은 마을마다 존재하며, 묵은 솜을 다시 틀고 이불을 덧대는 일을 해냈다. 그들의 손에서 솜은 살아났고, 낡은 겨울이불은 새 생명을 얻었다. 하지만 오늘날, 솜틀이 장인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이불은 대형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고, 솜이불 대신 합성섬유 이불, 전기장판이 대세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솜틀이라는 기술과 직업의 실체, 솜틀이 장인의 노동과 삶, 그리고 이 직업이 사라진 배경과 남겨진 문화적 의미를 조망하며 손끝에서 피어난 노동의 기억과 따뜻한 일상의 전통을 복원해보고자 한다.
2. 솜틀이 장인, 어떤 일을 했는가?
2.1 솜틀이란 무엇인가?
솜틀이는 묵은 솜을 털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공기와 함께 섬유를 팽창시켜 다시 폭신하고 따뜻한 이불솜으로 재생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전통 수공업 장인이다. 솜틀이라는 말은 ‘솜을 틀다’에서 유래하며, 이들이 작업한 공간은 흔히 ‘솜틀방’ 또는 ‘이불틀이방’으로 불렸다.
2.2 작업 방식
솜틀 작업은 주로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른다:
- 묵은 이불에서 솜을 걷어내고
- 불순물(머리카락, 먼지, 이물질 등)을 제거한 후
- 전통 틀기 기계(보통 톱니형 회전식 틀기틀)를 통해 고온 증기와 회전력을 가해
- 솜을 부풀리고, 결을 정리하고, 적절한 크기로 정제
솜을 다 틀고 나면 다시 이불의 속으로 넣고, 이불보를 덧씌우거나 새로 꿰매 완성된 솜이불을 만들어냈다.
3. 솜틀이 장인의 하루 – 손끝으로 피운 겨울 준비
3.1 노동의 시간
솜틀이 장인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는 사람이었다. 겨울철 성수기엔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하는 게 다반사였고, 이불 한 채를 틀고 꿰매는 데는 평균 2~3시간 이상이 걸렸다. 작업 중에는 뜨거운 열기와 먼지가 가득한 공기 속에서 장시간 서 있거나 앉아 손바느질을 해야 하므로 체력과 집중력, 그리고 손기술 모두가 요구되는 고된 직업이었다.
3.2 기술의 정밀함과 손맛
솜틀이는 단순히 솜을 기계에 넣는 작업자가 아니었다. 솜의 상태에 따라 몇 번을 더 틀지, 어느 정도로 솜을 부풀릴지, 솜의 결 방향과 층을 어떻게 나눌지를 육안으로 판단하고 손으로 조율하는 감각의 장인이었다. 특히 솜의 탄력, 따뜻함, 땀 흡수력, 오래가는 밀도 등을 좌우하는 건 솜틀이 장인의 경험과 손끝의 판단이었다.
4. 왜 솜틀이는 사라졌는가?
4.1 공장형 이불 제조의 대중화
1990년대 이후, 폴리에스터 충전재 이불 저가형 이불 세트 중국산 제품의 수입 확대 이러한 변화는 솜틀이의 핵심 대상이었던 솜이불의 수요를 급감시켰다. 새 이불을 사는 것이 묵은 이불을 다시 틀어쓰는 것보다 더 저렴하고 편리한 선택이 된 것이다.
4.2 주거 공간의 변화
솜틀방은 작은 소규모 작업장이지만 열기와 먼지, 큰 기계 소음이 발생하는 공간이었다. 아파트 중심의 주거 구조와 위생·소음 규제 강화로 인해 솜틀방은 주택가에서 퇴출되었고, 도심에서 솜틀이를 유지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4.3 기술 계승의 단절
솜틀이 기술은 특별한 교육 기관 없이, 오로지 손과 눈으로 익히는 ‘현장 도제식 전수’에 의존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에 비해 낮은 수익성 젊은 세대의 유입 부족으로 인해, 솜틀이 기술은 서서히 기록되지 않고 사라지는 무형 기술이 되었다.
5. 솜틀이 직업이 지닌 문화적 의미
5.1 겨울 준비의 풍경, 마을 공동체의 리듬
과거엔 마을마다 김장철이 끝나면 솜틀방이 북적였고, 가족 단위로 묵은 이불을 가져오고, 이웃과 작업 순서를 정하며 담소를 나누는 겨울맞이 공동체 문화의 중심이 솜틀방이었다. 이곳은 단지 이불을 수선하는 공간이 아니라 세대 간 기술이 공유되고, 가족의 시간이 모이고, 마을의 계절감이 체화되는 장소였다.
5.2 순환적 소비와 자원의 재활용
솜틀이는 오래된 자원을 버리지 않고 되살려 다시 사용하는 순환적 소비의 실천자였다. 이불 한 채를 다시 꿰매고, 솜을 틀어내고, 새 커버를 입히는 행위는 환경 친화적 삶의 전통적인 형태이자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지속 가능한 문화였다.
6. 결론 │ 손끝의 온기, 기억 속의 이불
솜틀이 장인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만들던 이불의 따뜻함은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들이 지녔던 기술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제품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정성, 감각, 손맛의 결정체였다. 지금은 없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하는 일은 한 시대의 생활 문화와 노동 정신을 복원하는 중요한 작업이다.그 마지막 겨울, 솜틀이 장인이 틀어주던 이불은 단지 따뜻한 물건이 아니라, 노동과 시간, 그리고 정이 배인 ‘인간적 기술의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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