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1. 서론 │ 깁는다는 것은 단순한 수선이 아니었다
낡고 해진 고무신의 뒤축을 바라보던 어느 날, 작은 천 조각과 본드를 들고 구멍 난 신발을 기워내던 고무신 깁기 장인의 손길이 떠오른다. 그들은 골목 어귀에, 재래시장 모퉁이에 작은 수선대를 펴놓고 닳고 해진 일상에 다시 발을 내딛을 힘을 덧입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기억 속에만 남아 있지만, 한때 이들의 존재는 서민의 신발 수명 연장을 책임지는 생활 속 필수 기술자였다. 이 글에서는 고무신 깁기라는 직업의 등장과 사회적 배경, 기술의 의미와 소멸 과정을 중심으로, 그들이 남긴 노동의 미학과 문화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2. 고무신 깁기란 무엇인가?
2.1 고무신과 서민 생활의 밀착성
고무신은 20세기 중반 한국에서 가장 널리 퍼진 서민용 신발이었다. 가볍고 저렴하며 비가 와도 젖지 않는다는 이유로 농촌의 노동자, 도시의 장사꾼, 어린아이와 노인까지 모두가 신을 수 있는 ‘보편의 신발’이었다. 하지만 고무 소재는 내구성이 약해 오랜 사용 시 쉽게 찢어지고 해지기 마련이었다.
2.2 수선 중심의 생활경제
지금처럼 신발을 쉽게 버릴 수 없는 시절, 구멍 난 고무신은 다시 신을 수 있도록 깁어야 했다. 고무신 깁기 장인은 신발의 해진 부분을 잘라내고, 고무 천을 덧대거나, 본드와 실을 이용해 꿰매고 붙이며 신발을 ‘되살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작업은 단순한 수선이 아니라 고장 난 생활의 순환을 다시 돌리는 노동이었다.
3. 깁기의 기술 – 손끝에서 완성되는 복원
3.1 깁기 방식의 정교함
고무신을 깁는 작업은 겉보기와 달리 매우 섬세하다. 패턴에 맞춰 고무천을 재단하고, 열과 압력, 접착제 비율을 조절해 붙인 뒤, 마모 방지를 위해 가장자리를 다시 감싸는 보강 처리까지 이어진다. 일부 장인은 무늬까지 복원하거나, 신발 크기에 맞춰 재조정하는 등 단순한 봉합 이상의 디자인 감각과 기능성 판단을 함께 고려했다.
3.2 현장형 기술자
고무신 깁기 장인은 시장 한편, 인도 가장자리, 혹은 집 앞 평상에서 작업대를 펼쳐놓고 일했다. 작업도구는 간단했지만 손의 감각, 본드의 농도 조절, 고무 재질에 따른 반응성 등은 오랜 경험 없이는 갖추기 어려운 생활 속 전문성이었다.
4. 고무신 깁기 장인의 사회적 의미
4.1 서민 경제의 실용적 기반
이들이 있었기에 단칸방 가장의 신발은 한 해를 넘겼고, 아이의 운동화는 새학기까지 버틸 수 있었으며, 시장 상인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고무신 깁기 장인은 가난한 시대에 소비 대신 수선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실천적 경제를 유지시킨 존재였다.
4.2 여성 노동으로서의 측면
특히 이 일은 남성 장인 외에도 집에서 일감을 받아 깁는 여성 노동자들을 통해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가사와 병행 가능한 유연 노동이자, 여성 생계형 일자리로서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5. 왜 사라졌는가?
5.1 소비 패턴의 변화
경제성장과 함께 고무신은 ‘수선해야 할 물건’이 아니라 쉽게 교체 가능한 소비재로 바뀌었다. 저렴한 중국산 신발, 대형마트 중심의 유통 구조 확산으로 인해 기존 수선업의 생존 기반이 붕괴되었다.
5.2 기능성 신발의 확산과 고무신의 퇴장
고무신 자체가 점차 운동화, 슬리퍼, 기능성 신발 등으로 대체되며 생활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고무신이 사라지자 이를 다루던 기술자들의 직업도 함께 잊히기 시작했다.
6. 사라진 기술, 기억 속의 문화로
6.1 민속과 박물관 속의 복원
일부 민속촌이나 박물관에서는 고무신 깁기를 옛 수공예의 일환으로 전시하거나 체험 프로그램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생계를 책임지던 노동의 깊이를 전하기엔 한계가 있다.
6.2 노동의 미학으로 다시 보기
고무신 깁기는 단순히 ‘옛날 일거리’가 아니라 자원순환, 지속가능성, 노동의 품격을 담은 활동이었다. 오늘날 버려지는 소비 중심 문화 속에서 이러한 장인의 삶은 ‘다시 쓰고, 다시 살린다’는 삶의 철학을 일깨운다.
7. 결론 │ 고무신을 깁던 손, 삶을 고치던 기술
고무신 깁기 장인의 손길은 단지 해진 신발을 고친 것이 아니라, 서민의 하루를 다시 걷게 만든 삶의 기술이었다. 그들이 앉았던 골목 모퉁이, 작업 도구가 걸렸던 리어카 한편, 고무 냄새와 본드 향이 섞인 공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의 노동은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되살림의 철학’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낡은 고무신을 고치던 일, 그것은 결국 헐거워진 삶의 틈을 다시 꿰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억을 덧입히던 정성의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라진 직업의 자취 속에서 노동이 단지 생계가 아닌 사람을 잇고, 공동체를 지탱하던 문화적 실천이었음을 배운다.
'잊혀진 직업 사전 – 사라진 일자리의 문화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등 조각사의 사라진 직업과 전통 석공예 (0) 2025.05.06 시계 수리공의 잊혀진 직업과 시간의 해체 (0) 2025.05.05 칼 갈이 장수 – 소리로 남은 잊혀진 직업 (0) 2025.05.03 베짜기 아낙네들의 집단노동 – 사라진 직업과 여성노동사 (0) 2025.05.02 기와 수선공의 잊혀진 직업과 종묘 보존기술 (0) 2025.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