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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시간을 고친다는 것의 의미
한때 도심 한복판, 또는 시장 골목 어귀에는 조그마한 유리 진열장 안에 각양각색의 손목시계와 벽시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곁엔 늘 루페(확대경)를 낀 채 작은 태엽과 톱니바퀴를 맞물리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계 수리공이었다. 시계 수리공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멈춘 시간의 흐름을 복구하고, 개인의 추억이 깃든 시계를 다시 작동하게 하는 시간 복원의 장인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디지털화, 소비 패턴의 변화, 간 감각의 변형 속에서 이들의 직업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이 글에서는 시계 수리공이라는 직업이 지닌 기술적, 문화적 의미를 살펴보고, 그들이 사라진 이유와, 그들이 남긴 '시간의 감각'이라는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2. 시계 수리공이라는 직업의 성격
2.1 미세한 세계를 다루는 기술자
시계 수리공의 주된 작업은 고장 난 기계식 손목시계, 탁상시계, 벽시계의 내부 기어를 분해, 마모된 부품을 교체하거나 재조립, 오일링하고, 정밀한 시간 조율을 복원하는 것이다.
단순한 전자부품 교체와는 달리, 기계식 시계는 수백 개의 부품이 미세한 정밀도로 조화를 이루며 작동한다. 따라서 시계 수리는 높은 집중력, 숙련된 손기술, 수학적 감각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2.2 기술자이자 심리적 회복자
시계 수리공에게 맡겨지는 시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닌, 선물, 유품, 기념품 등 감정적 가치가 담긴 물건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그 시간의 상징물을 복구함으로써 기억과 정서를 되살리는 기술자이기도 했다. 멈춘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일은 어쩌면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인간이 시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3. 시계 수리공의 전성기와 사회적 역할
3.1 시계가 귀했던 시절의 기술자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기계식 시계는 고급 소비재였다. 고장 나면 쉽게 버릴 수 없었고, 정기적인 정비와 관리가 필수적이었다.
이 시기 시계 수리공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고급 기술을 보유한 직업군으로 존중받았다. 상점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었지만,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이동식 공구함 하나로 일하던 수리공들도 많았다.
3.2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전문가
시계 수리공은 단지 ‘수리’를 넘어 시간의 정밀함, 기계의 정합성, 인간 감각의 보완이라는 복합적 지식과 기술의 융합자였다. 그들은 아날로그 시대의 시간 감각을 지키던 보이지 않는 시간의 관리자였다.
4. 왜 시계 수리공은 사라졌는가?
4.1 디지털 기술의 등장과 소비패턴의 변화
전자식 디지털 시계, 스마트워치의 대중화는 복잡한 기계장치 없이도 정확한 시간을 제공하게 만들었다. 한편, 저가의 쿼츠 시계는 고장이 나면 수리보다 교체가 더 저렴한 시대를 열었다. 시계 수리공의 기술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닌 ‘불편하고 오래 걸리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4.2 기술 전수의 단절과 장인의 고령화
시계 수리공은 대부분 도제식 전수로 기술을 익혔다. 정규 교육기관보다 현장 경험이 중심이 되는 직업군이었기 때문에 전문성을 유지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후계자 부족, 기술수요의 감소, 수익성 악화 등으로 젊은 세대의 유입이 중단되었고, 많은 장인들이 자연스럽게 은퇴하며 직업군 자체가 위축되었다.
5. 시계 수리공이 남긴 문화적 유산
5.1 시간에 대한 물리적 감각
기계식 시계는 초침이 ‘똑딱’하며 움직이고, 기어가 돌아가며 소리와 감촉으로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게 만든다. 시계 수리공은 이 '시간의 촉각성'을 유지하고 복구하는 물리적 시간의 수호자였다. 디지털화된 시대에 그들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시간의 실체를 직접 느끼는 능력도 함께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5.2 복원이라는 가치의 상징
시계 수리공의 작업은 단지 고장이 난 기계를 고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의 복원, 감정의 회복, 삶의 균형을 되찾는 행위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손목시계, 결혼 10주년에 받은 선물, 졸업 선물로 받은 첫 시계.
이런 물건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되돌려주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었다.
6. 결론 │ 멈춘 시계를 고치는 손, 사라진 시간의 기술
시계 수리공은 이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다루던 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 멈춘 기억을 다시 흐르게 만들며, 사람들의 삶에 질서를 회복해주던 기술자였다. 디지털 시계는 고장 나면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기계식 시계는 수리공의 손을 거쳐야만 다시 시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차이는 곧 시간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상징한다. 그들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시간을 손에 쥐고 있었던 마지막 세대의 흔적을 조용히 떠나보낸 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오래된 시계 하나를 손에 쥐고 “이건 누가 좀 고쳐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중얼거릴지 모른다.
그 시계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삶의 어느 순간, 그 시간의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멈춘 바늘을 통해 다시 한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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