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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벽을 입히는 사람들, 도배장
사람이 머무는 공간에는 언제나 ‘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은 단순히 구조물을 덮는 기능을 넘어, 집의 분위기를 만들고, 삶의 질서를 드러내며, 거주자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심리적 공간이었다. 이 벽을 손끝으로 정리하고 감싸던 직업이 바로 도배장이다. 흙벽에 한지를 붙이고, 주거 공간에 따뜻함과 정돈감을 부여했던 도배장은 한때 집짓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필수 노동자였다. 그러나 현대의 인테리어 산업 변화 속에서, 도배장은 ‘전문 기술자’에서 ‘사라진 직업’으로 천천히 밀려나고 있다.이 글에서는 도배장의 역할, 기술,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고, 그 사라짐의 배경과 의미를 되짚어본다.
2. 도배장이란 누구인가?
2.1 도배장의 정의
도배장은 종이나 천을 이용해 실내 벽면과 천장을 마감하는 기능직이다. 과거에는 한지, 장판지, 벽지 등을 수작업으로 붙이는 기술자였으며, 건축 마감공정 중 마지막 단계에 참여했다. 전통사회에서 도배장은 벽지 제작자와는 구별되며, 시공을 전담하는 현장 중심의 숙련 장인으로 구분되었다.
2.2 도배장의 일상 업무
한지를 자르고 풀을 만들어 섞고, 흙벽의 상태를 확인해 균열을 메운 뒤, 벽면에 종이를 정확히 이어붙이는 기술은 단순한 손재주가 아닌 시각, 감각, 공간 감성의 조합이었다.
3. 전통 도배 방식과 기술
3.1 흙벽과 한지의 조화
우리 전통 가옥은 대부분 황토와 나무로 만들어졌고, 내부 마감은 한지를 이용한 도배가 일반적이었다. 한지는 습도 조절, 단열 효과, 해충 방지 등의 기능을 지녀 흙과 함께 ‘숨 쉬는 벽’을 구성했다.
도배장은 먼저 벽면을 다듬고, 가루풀을 끓여 접착제를 만들고, 한지를 반듯하게 재단해 균형 있게 붙였다. 작업은 벽의 결, 조명, 공간 동선까지 고려해야 했기에 오감과 경험이 축적된 직업이었다.
3.2 도배장의 필수 도구
풀솔, 밀대, 재단칼, 자 등은 기본이었고, 일부는 직접 만든 전용 도구를 사용했다. 특히 한지를 일직선으로 잇는 기술은 장인의 손기술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4. 도배장의 사회적 위치와 유통 구조
4.1 장날과 작업 수요
도배장은 보통 마을 단위로 불려 다니며 작업했으며, 결혼, 이사, 상례, 제례 등 삶의 큰 변화가 있는 집에 주로 요청되었다. 그들은 장날 장터에서 약속을 잡거나, 주막에 머물며 마을 소식을 듣고 다음 일을 예약했다.
4.2 집집마다 다르던 도배의 미학
도배는 단순히 벽을 덮는 일이 아니라, 집의 신분, 취향, 행사 목적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다. 무늬 한지, 염색지, 금박지 등을 사용해 공간에 고유한 미감을 입히는 창조적 작업이었다.
5. 왜 도배장은 사라졌는가?
5.1 산업화와 건축 구조의 변화
1970년대 이후 콘크리트 아파트가 일반화되면서 흙벽과 한지라는 구조 자체가 사라졌다. 한지 도배 대신 롤 형태의 벽지가 주류가 되었고, 이는 대형 시공업체나 인테리어 전문업체가 주도하게 되었다.
5.2 자재의 변화와 노동의 분업화
전통 도배는 손으로 만들고 붙이는 전과정이 하나였지만, 현대 도배는 ‘벽지 구매’와 ‘시공’이 분리되며 전통적 도배장의 일체형 노동 구조가 해체되었다.
5.3 도제 시스템의 약화
도배장의 기술은 도제식 전승을 통해 이어졌지만, 산업화와 직업 다양화 속에서 후계자 양성과정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결국 도배장은 전문 장인에서 단기 기술 인력으로 인식이 전환되었고, 전통 도배의 미학은 천천히 사라지게 되었다.
6. 도배기술의 전통 계승과 현대적 재조명
6.1 한지 도배의 복원 노력
문화재청 및 일부 민간 단체에서는 전통 가옥 복원, 한옥 리모델링 사업을 통해 한지 도배 기술의 전승을 시도하고 있다. 도배장은 이제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전통 건축 미학의 핵심 기술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6.2 DIY 시대의 수요 증가
최근에는 친환경 건축 재료와 DIY 문화가 확산되며, 전통 도배법을 배우려는 일반인 수요도 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도배장은 단지 과거 직업이 아닌, 현대 삶 속에서 재발견되는 기술 유산이 되고 있다.
7. 결론 │ 벽을 입히던 기술, 삶의 결을 입히다
도배장은 단순히 벽을 덮는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는 흙과 종이, 풀과 손끝으로 집이라는 공간에 결과 표정을 입히는 예술가였다. 삶의 전환점에서 부르던 도배장은 집안의 정갈함과 평온함을 지켜주는 존재였고, 흙벽의 숨결에 한지의 고요함을 더하는 기술자였다. 지금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벽지가 대신하고 있지만, 한지를 재단하고 벽을 쓸어내리던 그 손끝의 기억은 아직도 고요한 한옥 한켠에 남아 있다. 도배장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기술과 공간 감각은 우리가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삶의 품격이자 손끝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집 벽 어딘가에서 조용히 말 걸고 있다.'잊혀진 직업 사전 – 사라진 일자리의 문화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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