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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명절이 바뀌자, 직업이 사라졌다
추석과 설날, 명절 아침이면 어김없이 펼쳐졌던 조상 제사상.
그 위에는 음식을 담는 그릇 못지않게 중요한 ‘제기(祭器)’가 놓여 있었다. 제기는 단순한 식기와 달랐다. 예(禮)를 위한 그릇, 즉 정성의 상징이었다. 한때는 제기를 전문으로 제작하던 ‘제기 장인’*이라는 직업이 엄연히 존재했고, 전국 각지에서 수공예 전통을 이어가는 장터가 붐비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플라스틱 제기세트가 대형마트에 진열되고, 제사의 생략이나 간소화가 보편화되면서 제기 장인의 손길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이 글에서는 ‘제기 장인’이라는 전통 직업이 어떤 맥락에서 형성되었고, 어떻게 쇠퇴하게 되었는지를 살피며, 그 과정 속에서 명절의 변화, 예(禮)의 의미, 손기술의 가치를 함께 성찰하고자 한다.
2. 제기란 무엇인가? – 한국 전통 예기의 문화적 의미
2.1 제기의 종류와 쓰임
‘제기’는 조상에게 음식을 올릴 때 사용하는 제사 전용 그릇으로, 전통적으로는 놋쇠(유기)나 나무로 제작되었다.
주요 제기의 예:
- 잔(盞): 술을 따르는 그릇
- 접시(碟): 과일이나 포를 담는 평평한 용기
- 합(盒): 고기나 탕, 반찬류를 담는 뚜껑 있는 그릇
- 병(甁), 병좌: 술병과 받침
- 시루(甑): 떡류를 올리는 그릇
이 모든 그릇은 기능을 넘어서 상차림의 구조와 상징성을 지탱하는 예술품이었다.
2.2 유기 제기와 장인의 기술
특히 놋쇠 제기는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든 합금을 가열해 두드리고, 표면을 고르게 연마하고, 음식을 올렸을 때 변색되지 않도록 마감하는 고난도의 수공예 기술을 요구했다. 장인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조상을 향한 예를 구현하는 정신적 매개자였던 것이다.
3. 제기 장인이라는 직업의 형성과 존속
3.1 조선시대부터 전통시장까지
조선시대에는 유기장, 목기장 등 제기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층이 따로 있었다.
이들은 궁중과 지방 양반가에 납품하거나, 명절 전후로 전국 장터를 돌며 판매했다. 특히 설, 추석을 앞두고는 서울 남대문, 종묘 인근, 안성, 공주, 영주, 익산 등의 향토 공예 중심지에서 제기 장인들이 이동식 매대를 차리고, 주문 제작을 받기도 했다.3.2 일생에 한 번, 혼례와 함께 준비하던 제기
과거에는 혼례를 앞두고 제기를 마련하는 것이 한 가정의 ‘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는 단순한 물건 구매가 아닌, 예절과 가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행위였다. 이렇듯 제기 장인의 기술은 삶의 경계와 통과의례에 깊이 얽혀 있었고, 일상의 도구가 아닌 ‘관계의 의례물’로 기능했다.4. 명절 문화의 변화와 제기 장인의 쇠퇴
4.1 간소화된 제사, 변질된 의례
1980년대 이후 산업화,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핵가족화, 명절 귀성의 어려움, 종교적 다양성의 확산으로 인해 제사를 아예 생략하거나 간단하게 치르는 가정이 많아졌다. 또한 전통 방식의 상차림 대신 편의점 제사세트, 1인 제사 키트 등도 등장하면서 예의 격식보다는 실용성과 간소함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는 제기 수요 자체의 급감으로 이어졌고, 장인의 존재 이유 자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2 대체품의 등장과 기술의 전락
1990년대부터는 금속 성형 기술을 활용한 기계제 유기, ABS, PVC로 제작한 플라스틱 제기세트가 대중화되며 전통 수공예 제기의 자리를 대체했다. 플라스틱 제기는 가볍고 저렴하며 관리가 용이하지만, 그릇 자체에 깃든 예술성이나 정신적 무게는 상실되었다.
5. 제기 장인이 남긴 문화적 유산
5.1 ‘보이지 않는 기술’의 미학
제기 장인은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이자 보이지 않는 질서를 구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만든 제기는 조상의 혼과 현재 살아 있는 자손의 삶을 연결하는 시간적 다리의 역할을 했다. 이것은 단순한 ‘그릇’이 아닌, 정체성, 기억, 예의 가시화된 구조물이었다.
5.2 사라진 손기술의 복원 가능성
최근 전통 수공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무형문화재 유기장 전승, 목기·칠기 공방의 부활, 명절문화 교육 프로그램 등 제기 장인의 기술을 복원하고 재조명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전통 기술이 현대 생활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6. 결론 │ 사라졌지만 기억되어야 할 손의 문화
제기 장인이라는 직업은 더 이상 일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다루던 것은 단지 냄비와 접시가 아니었다. 그들은 ‘예’라는 추상적 가치를 손으로 구현했던 마지막 기술자였다. 명절이 바뀌고, 생활 양식이 변했지만 그릇 하나에도 담긴 정신과 격식은 여전히 가치 있는 문화 자산이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옛 물건을 복원하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태도, 가치, 관계를 지금 우리의 삶에 되살리는 것이다. 제기 장인의 이야기는 잊혀졌기에 더욱 귀중한 기술의 역사이자, 잊혀지지 않아야 할 정신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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