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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백김치는 남고 두부장수는 사라졌다
우리는 종종 음식과 기억을 함께 떠올린다. 어머니의 백김치, 아버지의 된장국, 할머니의 묵은지처럼 한 조각의 맛은 특정한 사람과 장소, 혹은 시간대를 불러온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다룰 대상은 음식이 아니다. 음식을 만들고, 전하고, 새벽의 골목을 울리던 사람들, 바로 두부장수다. 한때는 백김치보다 더 자주 마주쳤고, 시장보다 더 가까이 있었던 존재.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라지고 기록에서도 점점 잊혀져 간다.이 글은 두부장수가 단순히 사라진 직업이 아닌, 한 시대의 생활 감각과 공동체의 리듬을 형성했던 문화적 존재임을 조명하고자 한다.
2. 두부장수는 누구였는가?
2.1 두부만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두부장수는 두부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제조자이면서 판매자였고, 배달자였고, 고객과 관계를 맺는 상담자였으며, 동네의 ‘새벽 인사 담당자’였다.즉, 두부장수는 두부라는 음식을 중심으로 형성된 생활 인프라의 축이었다. 마트나 온라인 몰이 존재하기 전, 동네마다 ‘그 집’이 있었고, 그 집에는 ‘그 사람’이 있었다. 두부장수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2.2 이름보다 소리가 익숙했던 존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부장수의 이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종소리는 잊지 않았다. 은은하게 울리던 작은 종, “두부요—따끈한 두부 나왔어요—”라는 목소리.
그들은 존재 자체로 한 동네의 생활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를 형성했다.
이 사운드는 아침을 열었고, 하루를 정리하게 했으며, 동네의 경계를 나누고 연결했다.3. 두부장수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갔는가?
3.1 새벽은 일의 끝이자 시작이었다
두부장수의 하루는 자정 무렵 시작되었다. 콩을 씻고, 불리고, 간 후 끓이는 과정은 정해진 매뉴얼이 아니라 감각과 손맛이 결합된 노동이었다.
- 간수를 넣는 타이밍
- 물의 양과 불 조절
- 틀에 넣는 압력과 시간
이 모든 것은 기계가 아닌 인간의 감각으로 조율되었다.
두부가 완성되는 시간은 새벽 3~4시.
이때부터 두부장수는 손수레에 물통을 싣고, 두부판을 올려, 골목마다 종을 울리며 돌아다녔다.3.2 그들은 단골의 기호까지 기억했다
“할머니 댁은 꼭 부드러운 순두부”, “저 집은 찌개용이라 단단한 걸로.”
그들은 고객의 이름보다 두부의 질감, 손님의 입맛, 가족 수까지 기억하는 이웃이었다. 이러한 기억은 고객 관리 전략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였으며, 그래서 두부장수는 단순한 판매자를 넘어 동네의 일원으로 기능했다.
4. 백김치보다 더 익숙했던 이유는?
4.1 두부는 식탁의 기본, 두부장수는 일상의 기본
두부는 하루 세 끼 중 한 끼 이상 식탁에 올랐다. 된장국, 순두부찌개, 두부조림, 두부부침…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가성비 높은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그리고 그 두부를 책임진 사람이 바로 두부장수였다. 그의 존재는 두부가 익숙한 만큼이나, 오히려 더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백김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두부는 매일 만들어야 하고, 매일 팔아야 했고, 매일 먹어야 했다.4.2 정기성과 신뢰 기반의 거래 구조
두부장수의 영업 방식은 정기적 방문, 외상 가능, 품질 보증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이루어졌다.
- 매일 혹은 이틀에 한 번 같은 루틴
- “이번 주에 외상이에요”가 통하던 신뢰
- “지난번보다 덜 단단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피드백의 유효성
이러한 구조는 현대의 반복구독경제(subscription economy)보다 더 지속 가능하고 인간적이었다.
5. 두부장수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5.1 기술과 유통, 그리고 시장의 재편
1990년대 이후
- 대형 유통점의 등장
- 냉장 유통 기술의 확산
- 대기업 중심의 식품 공업화
이러한 변화는 두부장수와 같은 소규모 자영업자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고객은 품질보다는 편의성과 가격을 선택했고, 두부의 ‘맛’보다 ‘브랜드’를 인식하게 되었다.
5.2 삶의 리듬과 공동체의 해체
두부장수의 기반은 이웃, 골목, 반복되는 리듬이었다. 그러나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웃과 대화에서 비대면 주문으로 종소리에서 모바일 알림으로 생활의 패턴이 바뀌면서 두부장수가 설 자리는 사라졌다. 그 결과, 우리는 두부는 먹지만 두부를 전하던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6. 두부장수의 문화사적 의미
6.1 도시형 직업의 원형
두부장수는 장소가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신뢰 기반으로 생산–유통–판매가 하나의 인격체에 의해 수행되는 도시형 직업의 원형이었다. 이 모델은 오늘날 1인 창업, 동네 장터, 로컬푸드 운동 등의 맥락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6.2 음식과 사람의 연결고리
두부장수는 단지 음식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음식과 사람 사이를 잇는 매개자였다. 그는 냉장고보다 먼저 두부를 보관했고, 배달앱보다 먼저 골목을 돌았으며, 마케팅 없이도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방식은 비효율적이었지만, 사람 중심적이며 기억에 남는 방식이었다.
7. 결론 │ 백김치는 남고 두부장수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백김치를 담근다. 그리고 여전히 두부를 사 먹는다. 그러나 백김치를 파는 사람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두부장수의 종소리는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것은 단지 상업 활동이 아니라 사람과 시간, 공간이 연결되던 일상적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잃은 것은 두부 자체가 아니라 그 두부를 통해 관계를 만들고, 정을 나누던 한 사람의 직업이자 삶이다. ‘두부장수’라는 말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백김치보다 더 부드럽고, 오래 익은 온기로 우리 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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